안녕.
오늘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언젠가 내 인생을 책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첫 페이지를 열어본다.
나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이자, 풀타임 워킹맘이고, 해외에 살고 있는 이민자다. 그리고 외국인 남편과 국제결혼을 해 뉴질랜드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경상도의 아주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언니가 셋 있는 막내였고,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자랐다. 막내라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큰언니와는 14살 차이가 나서, 오히려 조카들과 나이 차이가 더 적었다.
우리 엄마는 늘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다. 나는 워낙 잘 먹는 아이였고, 그것만으로도 엄마는 나를 참 예뻐했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사랑해 줬다는 기억은 쉰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 든든한 기둥처럼 남아 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버티게 해 주는 힘이다.
우리가 어릴 때 가족에게 받은 영향은 때로 너무 당연해서 그 의미를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 경험들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평생 우리의 생각과 선택에 영향을 준다.
내 친구 중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도 큰 슬픔 속에서 자녀들에게 충분히 신경 쓰기 어려웠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만큼은 다른 건 몰라도 음식 하나만큼은 정말 잘해준다. 어린 시절 받지 못했던 사랑의 한 부분을 아이들에게 채워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또 어떤 친구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경험 때문에, 지금도 남자를 볼 때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와 비슷한 기준을 적용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어린 시절 가족에게 받은 사랑, 부족함, 상처, 그리고 기억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게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부모가 되고, 어떤 삶을 선택하는지에도 조용히 영향을 준다.
어릴 때 나는 조용한 아이였다. 책 읽는 걸 좋아했고, 마음속에는 항상 크게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농사를 지으며 늘 바쁘게 살아가는 부모님을 보면서 내가 꿈꾸던 큰 도시, 큰 대학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걸 일찍부터 알게 됐다.
나는 김천이라는 소도시에서도 더 시골인 면 단위에서 자랐다. 가끔은 우리 집이 식당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도와 돈도 벌고 집안에 보탬이 될 수 있었을 테니까. 또 집 근처에 도서관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책을 읽으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자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은 아니었다. 그래서 난 커서 이 작은 시골을 벗어나 무작정 큰데로 가고싶었다.
내가 열 살이었을 때 큰언니가 결혼했다. 그런데 언니의 시댁에서는 우리 형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예물을 요구했고, 결혼이 거의 무산될 뻔했다. 그 일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결혼을 하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사람을 평가해야 하지?'
'왜 결혼 한 번 하려고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다 쏟아부어야 하는 걸까?'
'왜 결혼 적령기가 되면 결혼 안 하냐고 묻는 걸 당연하게 생각할까?'
그런 한국의 고리타분한 문화가 너무 싫었다. 어쩌면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꿈도 그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것 같다. 드라마에서도 보면 한국 남자들은 왜 꼭 아내에게 밥해달라고 하고 왜 며느리는 시댁 식구때문에 커리어도 접어야 하고 이런 모순적인 문화가 싫었다 난.
대학 졸업 후 취업도 못하고 일년.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리고 난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우리 집 형편에 영국까지 간다는 건 정말 사치였다. 하지만 막내였던 나는 그런걸 고려할만큼의 철이 없었다.
그즈음 언니와 함께 살던 전셋집이 사기를 당해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 두셨던 2천만 원을 잃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너무나 큰돈이었다. 먹을 것까지 아껴가며 겨우 모은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일을 겪고 나니 더 이상 철부지처럼 영국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영어학원에서 일하면서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됐고,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나보다 여섯 살 어린 뉴질랜드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사실 이 결혼 이야기는 한 편으로는 절대 끝낼 수 없다. 어쩌면 한 시즌이 필요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들려주려고 한다.
그렇게 결혼을 했고, 어느새 뉴질랜드에서 산 지도 15년이 넘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물처럼 잔잔했다. 조용했고, 지루할 만큼 큰 사건도 없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서 거대한 파도를 만났다.
그 파도를 어떻게 버텼는지, 그 안에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그래서 나는 오늘 이렇게 노트북을 열었다.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냥 재미있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